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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이야기

[성모 성월] 한국 교회 역사안에서의 성모신심

 

창설 초기부터 조선교구 설정 이전까지 성모신심

 
평신도에 의해 자생적으로 설립된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성모신심은 창설초기부터 신자들의 신앙생활 중심에 자립잡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1791년 모친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운 진산사건 의 주범으로 잡혀 순교한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은 죽기 직전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여러번 불렀다고 전해집니다. 또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김광옥(안드레아)도 형장에 끌려가면서 큰소리로 묵주기도를 바쳤으며 이순이(루갈다)와 김사집(프란치스코)은 가족들에게 언제나 성모 마리아에게 의지하며 살 것 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사실들은 초기 한국 교회 신자들이 성모신심을 간직한 채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통해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증거하고자 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초기 한국교회의 성모신심을 더욱 확연히 보여주는 것은 동정녀 의 존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유박해 이전까지 기록에 의하면 당시 교회에는 강완숙(골룸바) 집에서 성모발현을 목격했다는 윤점혜(아가다)를 비롯해 정순매(바르바라) 김경애 조도애 이득임 등이 동정녀로 살고 있었습니다. 이는 정결을 강조한 주문모 신부와 칠극 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성모님의 삶을 본받으려는 신자들의 열의가 그만큼 강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조선교구 설정부터 신앙자유 이전까지 성모 공경


1831년 조선교구 설정 이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한국교회의 성모신심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됩니다. 매일 묵주기도와 칠고의 묵주기도를 바칠 정도로 돈독한 성모신심을 지녔던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 이어져 1836년에는 마리아를 공경하고 성모의 전구를 청하기 위해 묵주기도를 바치는 매괴회 가 창립됐고 신자들이 자신을 성모님의 종으로 봉헌하며 그의 특별한 보호를 청하는 성의회 도 이 무렵 설립됐습니다.
 
성모신심이 널리 확산되자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는 1838년 12월 원죄없이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 를 조선교구 주보로 정해줄 것을 교황청에 요청했다. 당시 조선교구는 북경교주 주보인 성 요셉 을 주보로 공경해 왔었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41년 성 요셉과 함께 원죄없이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 를 주보로 모실 수 있도록 허가했다.

이후 조선교구 제4대 베르뇌 주교는 한국교회를 성모의 보호 아래 맡긴다는 뜻에서 1861년 10월 조선교구를 8개 사목구로 나눈 다음 7개 사목구를 성모와 관련한 이름으로 명명했습니다. 예를 들어 서울지역을 성모무염시태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사목구로 충청도 홍주지방은 성모성탄 공주지역은 성모영보 (주님 탄생 예고) 충청도 동북부 지방은 성모자헌 충청도 서부지방은 성모왕고 (동정 마리아 방문) 경상도 서북부는 성모승천 경상도 서부지방은 성모 취결례 (주님 봉헌) 사목구로 각각 칭한 것입니다.

근·현대 한국교회 성모신심


1886년 한불 수호통상조역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은 한국 교회는 1887년 그간 교회 내 성모신심단체로 활동해온 성모성심회 매괴회 성의회 등을 공식 단체로 승인했습니다. 또 1890년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는 성모님께 조선교회를 봉헌했으며 1911년 설립된 대구대교구는 교구 주보로 루르드의 성모 를 모셨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성모신심은 계속 이어져 성모성심회와 매괴회 성의회가 본당 신심단체로 확산됐으며 신자들은 성모께 조선의 독립과 자주를 간절히 기원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맞게 된 해방과 건국은 한국 교회 성모신심에 새로운 활력을 제공하게 됩니다. 1945년 8월15일 맞은 광복일과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일이 성모승천대축일 과 겹치게 되자 한국 교회는 광복과 건국이 주보인 성모 마리아의 도움에 의한 것이라고 굳게 믿게 되면서 성모신심이 활성화됐기 때문입니다.


이후 한국 교회에는 외국으로부터 새로운 성모신심 단체가 유입되면서 성모신심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기본적 신심으로 자리잡습니다. 이를 위한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 레지오 마리애와 파티마의 세계사도직(푸른군대)입니다. 이 단체 회원들은 성모신심을 바탕으로 다양한 선교활동과 봉사활동을 전개하여 한국교회의 성모신심 활성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울러 마리아 사제운동 성모의 기사회 등 다양한 성모신심 단체가 60∼70년대 이후 잇달아 도입 한국교회는 세계 교회가 부러워할 정도의 성모신심 대국 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 전반 깊숙히 내재돼 있는 기복적 요소와 맞물러 그간의 성모신심은 성모의 삶을 본받으려는 성숙한 모습이 아니라 세속적 복락을 간구해 얻는 대상으로 여기는 그릇된 모습을 띠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일선 사목자와 신학자들은 검증되지 않는 성모 발현이나 신비로운 현상을 쫓아 현세적 복을 기원하는 것을 성모에 대한 올바른 신심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