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성인명 :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Andrew)
축일 : 7월 5일
성인구분 : 성인
신분 :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Korea)
활동연도 : 1821~1846년
같은이름 : 김 안드레아, 김안드레아, 안드레아, 안드레아스, 앙드레, 앤드루, 앤드류
성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는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 마을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건의 아명은 재복(再福)이고 이름은 지식(芝植)이라고 하는데, 그의 집안은 열심한 구교 집안이다.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Pius)와 아버지는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다. 신앙 깊은 순교자의 집안에서 성장한 김대건은 굳센 기질과 열심한 신덕으로 충실히 생활하던 중, 16세 때인 1836년에 모방 신부에 의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가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 프란치스코는 병사하였으므로, 남은 두 신학생만이 훌륭히 학업과 성덕을 닦았으나 나이가 25세에 이르지 못하여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무렵 파리 외방 선교회가 조선 교구를 담당하여 주교와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켜 전교하고 있는 중이었으나, 조선이 외국과 수호조약을 맺지 않아 종교자유가 없었음으로 프랑스 루이 필립 왕이 파견한 함대의 세실 제독이 그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나섰다. 김대건은 세실 제독의 통역관이 되어 조선이 들어갈 메스트르 이 신부와 함께 에리곤 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실 제독이 갑자기 조선 항해를 중지하게 되어 김대건은 혼자 육로로 본국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변문에 이르러 조선 사절단의 일원인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본국 소식을 자세히 듣게 되었는데, 성직자를 비롯하여 아버지와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국을 서둘러 그해 12월 29일 혼자 의주 변문을 거쳐 입국하였으나 중도에서 본색이 탄로날 위험이 생겨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김대건은 백가점(白家店)과 소팔가자(小八家子)에 머물며 메스트르 신부로부터 신학을 배우고,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고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다시 입국을 시도하여 고 주교와 함께 변문으로 왔으나 김 부제 혼자만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1845년 4월 주교와 신부를 맞이하기 위하여 상해에 갔다가 그 해 8월 17일 상해로부터 20리가량 떨어진 김가항(金家港)에서 페레올 고 주교 집전으로 신품을 받았고, 그곳의 만당(萬堂) 소신학교에서 첫 미사를 드림으로써 조선교회의 첫 사제가 되었다.
같은 달 31일 고 주교와 다블뤼 안 신부를 모시고 라파엘호라 명명한 작은 목선을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1845년 10월 12일에 충청도 나바위라는 조그마한 교우촌에 상륙하였다. 김 신부는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만주에서 기다리는 메스트르 이 신부를 입국시키려고 애썼으나, 의주 방면의 경비가 엄해서 고 주교는 바닷길을 알아보라고 지시함으로, 백령도 부근으로 갔다가 순위도에서 1846년 6월 5일 밤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김 신부가 황해 감사 김정집의 심문에서 자신은 조선에서 출생하여 마카오에서 공부했음을 토로하자 황해도 감사는 황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이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여 중신회의를 열고 서울 포청으로 압송케 하였다. 일부 대신들은 김 신부의 박학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하여 배교시켜 나라의 일꾼으로 쓰자고 하는 의견도 있고 해서 배교를 강요했으나, 김 신부는 도리어 관리들을 교화시키려고 하자 사학의 괴수라는 죄목을 붙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김 신부의 나이는 26세였다.
1. 소년 김대건(안드레아)의 세례
김대건(안드레아)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김운조(비오)의 증손자이며 부친은 김제준(이냐시오)이다. 그리고 모친은 고 우르술라이다. 그는 1821년 8월21일 충청도 솔뫼에서 태어나서 열심한 신자집안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1814년에 증조부인 김진후(비오)가 해미 감옥에서 순교를 하고 또한 1816년 을해박해 때는 종조부인 김종한(안드레아)가 대구 관덕정 형장에서 순교하는 등 집안이 신앙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 뿐 아니라 1827년에는 정해 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조부인 김택현은 고향을 떠나 서울의 청파동을 거쳐 경기도 용인땅 한덕골에서 얼마간 살다가 다시 산 너머 골베 마을로 이사를 가서 정착하였다.
그는 그 때부터 조부에게 한문 공부를 하였다.
그러다가 1831년 조선교구가 설립되고 1836년 초에 모방(Maubant나)신부가 입국하여 곧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 지방을 다니면서 전교 활동을 폈다.
그때 그는 1836년 6월 초순 경기도 용인의 은이공소에 가서 포교 활동과 성사 집전하는 중에 은이공소 회장 김제준(이냐시오)의 아들 김재복(대건)에게 "안드레아"라는 본명으로 세례성사를 주고 그를 신학생으로 선발하였다.
2. 김 안드레아 마카오 신학교 유학(留學)
이렇게 해서 그는 우리나라 사상(史上) 처음으로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그는 곧 그 해(1836) 7월 11일에 서울에 올라와 이미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서울에 와서 공부를 하고있던 충청도 홍주 다랫골에 사는 최방제(방지거/프란치스코)와 경기도 과천교우 최양업(도마/토마스)와 같이 한문과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박해 때문에 이들을 국내에서 신학공부를 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모방(Maubant) 신부는 이 세 소년을 중국 마카오의 파리 외방전교회에 보내 공부를 계속 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세 소년중 가장 나이가 어린 김대건은 수련기간이 짧아 처음에 같이 보내기를 주저했으나 다시 그런 기회가 없을 것 같아 결국 함께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 세 소년들은 1836년 12월 2일 출발에 앞서 성서에 손을 얹고 장차 조선포 교지의 장상과 신학교 교장에게 절대 순종할 것을 선서한 다음 이튿날인 12월3일 모방 나신부님의 장도를 축복하는 마지막 강복을 받고 정하상, 현석문, 조신철, 이광열 등 네 회장님의 안내를 받으며 붕정 만리 유학 길에 올랐다. 그 달 28일에는 무사히 의주 변문에 도착하여 압록강을 건너 중국 땅을 밟았다.
(註. 김재복 일행 유학생이 중국으로 갈 때는 청국인 신부 유방제가 귀국할 때 동행하였다.)
무사히 국경을 넘은 김 안드레아 일행 3명은 샤스땅(Chastan)신부의 길 인도자였던 중국인 인도자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조선으로 봉천 산해관을 지나 북경에 당도하여 몇 일을 휴식한 후 다시 길을 떠나 천진 제남을 거쳐 남경에 도착하니 여러 신부님들이 반가이 맞아주고 격려해 주었다. 남경은 북경과 같이 큰 도시였다.
다시 길을 재촉한 일행은 항주를 거쳐 소주로 왔다. 중국에서도 경치가 좋기로 손꼽히는 고장이다. 가을달 비치는 동정호가 있는가 하면 춘색을 자랑하는 아미산의 절경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여기까지는 북경에서 마카오까지의 절반의 여정이었다. 항주와 복주를 지나 하문에 왔다. 하문은 동지나해와 남지나해 사이에 있는 항구도시였다. 하문에서 광동까지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말씨도 달랐고 인물도 북쪽과는 달랐다. 과연 중국 대륙은 큰 나라구나 하는 마음을 새삼 느끼게 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세 소년은 안내하는 중국인에게 말을 배워 서로 서투르나마 의사 소통을 하게 되었다. 광동에서 마카오까지는 멀지 않다는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세 소년의 마음은 사명감의 중대함과 천주님의 부르시는 길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목적지가 가까워 올수록 더욱 용기가 났고 희망에 부풀었다.
그들 일행이 마카오에 도착한 것은 1837년 6월7일 이였다. 고국 서울을 떠난지 6개월 28일의 긴 여행이었다. 어린 세 소년들은 생후 처음 겪는 고생길이었고 만리가 넘는 도보 여행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건강하게 피로의 기색도 없이 목적지 마카오에 당도한 것이다. 이들은 다시 한번 천주님과 성모님의 가호 하심에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마카오는 일명 오문이라고도 하는 포르투갈의 조차지로서 서구인들의 동양진출의 유일한 관문이었다. 거기에는 로마 교황청 포교성 직속 경리부가 있어 동양 전교사업의 본거지로 삼고있었다. 파리 외방전교회 경리부장 르그레조아(Legregois)신부는 당시 페랑 신학교의 중국인 신학생들의 정신이 좋지 못하므로 이 세 소년은 조선 교구장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직접 이들 신부님들에 의해 수학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부모님과 같이 사랑해주는 스승 신부님들의 슬하에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공부에만 열중하였다. 그들은 모두가 자신들이 장차 짊어질 책임의 중대함과 사명감에 입각하여 열과 성을 다하여 공부했기 때문에 학문의 진도도 빨랐고 지도자로서 자질도 어느 정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세 신학생이 공부를 시작한지 2개월 만인 8월에 마카오에서 포루투갈의 보호권 문제로 잠시 마닐라로 피신을 하였다. 이듬해에는 가장 나이 많던 최방제(프란치스꼬, 최도마의 사촌형)가 우연히 득병하여 스승 신부님의 간절한 기도와 약석의 효험도 없이 이역만리 타향에서 세상을 떠났다. 함께 형설에 공을 쌓아 고국에 돌아가서 민족의 길잡이가 되고 개척자가 되고자 철석같이 약속했겠지만 한 학우를 잃은 김 안드레아와 최 도마의 아픈 마음은 말할 수 없었다.
3. 김 안드레아 부제 귀국과 사제서품
형설의 공을 쌓기 7년 김 안드레아는 1884년 12월 15일 부제품을 받았다. 그런데 이에 앞서 1842년 2월 15일에는 조선 정부와 친선조약을 맺고자하는 불란서 함대 에리곤호에 통역관으로 탑승하여 조선 교회 사정을 살필 중대한 사명을 띄고 입국을 꾀하였으나 남경의 함락과 동시에 청국이 영국 측에 강화를 제의하여 남경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세실 제독은 조선 입국을 포기하게 되어 실패하고 마닐라로 돌아갔다. 그 후 김안드레아는 이어 중국과 만주지방을 수없이 편력하면서 3회에 걸쳐 입국기회를 노리다가 마침내 2년여만에 1845년 1월15일 그 목적이 이루어져 8년 만에 그리던 고국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러나 김 안드레아 부제의 귀국을 반갑게 맞아 줄 조국은 아니었다. 사학 죄인의 누명이 씌워져 그를 잡으려는 위험이 뒤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몇몇 교우들이 비밀리에 마련한 서울의 돌우물골(石井) 집에 은신하여 극히 제한된 사람에게만 알리고 그 모친에게까지도 알리지를 않았다. 그 동안 그는 마카오를 떠난지 3년여의 고생과 피로가 겹쳐 발병되어 1개월의 병고를 겪었으나 무사히 건강이 회복되어 그 동안에 못다한 순교자들의 치명 기록을 정리하고 신학생을 뽑아 교육하고, 조선 지도를 작성하고 국내 정세와 교회사정을 상세히 살핀 후 페레올(Ferreol 고)주교를 모시기 위해 그해 4월 30일 11명의 사공과 함께 다시 마포를 떠나 인천항을 거쳐 상해로 돌아가 고주교님께 보고함으로서 맡은 바 사명을 다하였다. 그 동안 3일간 바다에서 거센 풍랑을 만나 말할 수 없는 어려운 고통을 겪었으며 또한 해적을 만나 약탈당할 위험도 있었으나 그의 대담성으로 물리쳤다. 이렇게 해서 천신만고 끝에 상해로 돌아온 김안드레아 부제는 곧 그들의 도착을 페레올 주교에게 알렸고,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Daveluy) 신부와 같이 상해로 왔다. 그후 페레올 주교는 출발에 앞서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에게 1845년 8월17일 상해에서 30리 거리에 있는 김가항 이라는 곳에 있는 조그마한 성당에서 조선 교회의 3대 교구장 페레올 고(Ferre'ol)주교의 집전으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사제서품을 받았다.
새로 사제 위에 오른 김안드레아 대건 신부는 상해에 있는 완당 신학교 성당에서 8월24일(음) 첫 미사를 봉헌했다. 그리고 곧 1845년 8월31일에 그 동안 배 수리를 마친 [라파엘]호를 타고 주교와 신부 일행은 귀국 길에 올랐다.
4.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포교활동
그리하여 조그마한 배 한 척에 페레올(Jean Joseph Feireol)주교, 다블뤼안(Maris-Antoine Nicolas Daveluy) 신부를 인도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장 25척,폭이 9척 밖에 안되는 이 적은 라파엘(Lafael)호는 문자 그대로 일엽편주였다.
또한 도중에 풍랑을 만나 제주도 남단에 표류하는 비운도 겪었으나 주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다시 순풍을 얻어 충청도 금강하구에 있는 은진군 강경리 황산포에 무사히 닻을 내려(註 황산포: 지금의 강경읍 홍교동 101번지) 구순오라는 교우집에 첫발을 디디게 되었다. 이같이 구사일생으로 황산포에 도착한 것은 1845년 음 9월 12일(양력 10월 12일)이었으니 상해를 떠난지 꼭 42일째 되는 밤이었다. 그는 이렇듯 10년 형설의 공을 쌓고 고국에 금의 환향하는 김신부의 귀국은 영화롭지가 못했다. 처음 출국 할 때도 그러했고 귀국 길 또한 그러했다. 언제나 죽음과 싸워야하는 고난과 형국의 길이었다.
고국에 돌아온 김신부에게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우선 다블뤼((Daveluy 안)신부는 남쪽 지방의 전교를 맡기 위해서 그곳에 남게 하고 그는 페레올(Ferre'ol) 주교를 모시고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온 후에 주교를 안전한 곳에서 조선말을 배우시도록 하시고 그는 주교님의 명으로 서울과 인근 특히 경기도용인 지방을 중심으로 교우를 방문하고 성사를 집전 하였다. 그리하여 고향 용인으로 돌아가 어머니와 동생 란식을 만났다. 10년 만에 만나는 모자(母子)의 상봉(相逢)이었다. 반갑고 슬픈 눈물이 피차의 앞을 가리웠고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였다. 너무도 변모한 어머님이었다. 그 동안의 고생으로 늙고 쇠진한 노인이었다.
한편 어머니는 천주님의 사도로서 위엄이 깃 든 아들을 눈앞에 대할 때 그 동안에 겪은 온갖 고통과 서러움이 일시에 가시고 처음으로 삶에 기쁨을 맛보았다.
김신부는 어머니와 함께 살던 골배마실로 왔다. 10년 만에 보는 마을은 황폐(荒廢)했고 몇 집 있지도 않았다. 군난 때 쑥대밭이 된 까닭이다. 그러나 눈에 익은 사과 골짜기에 맑은 물 그리고 항상 올라가 글도 읽고 놀던 바윗돌은 옛날을 말하는 듯 그대로였다. 그러나 지난 기해(1839년)박해 때 부친 김 이냐시오와 당고모 김 데레사 등이 순교한 사실을 알고는 무척 마음에 감회가 깊었다.
김신부는 얼마동안 어머니를 모시고 골배 마실에서 은거하고 있으면서 은이를 비롯해서 은석골, 텃골, 사리틔, 검은정이, 먹뱅이, 한덕골, 미리내, 한티, 삼막골, 고추골, 용바위, 단내등지의 흩어져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주고 전교를 하였다. 당시 김 안드레아 신부님이 은이를 중심으로 하여 근방 2~30리 떨어져 살고 있는 교우들을 찾아 전교하시던 고난의 전교실화를 1866년 12월 17일 광주 남한산성에서 치명 하신 정 바오로(정 레오 신부의 증조부)씨 집안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다.
집안 어른들께서는 김 신부님께 성사(고백성사)받던 이야기를 하시곤 했는데 김 신부님은 항상 밤으로만 다니셨다 한다. 김 신부님과 복사가 깊은 밤중에 대문밖에 오시어 "정생원! 정생원!"하며 증조부 바오로를 찾으시는 소리에 식구들은 모두 잠을 깨었으나 누가 무슨 일로 찾는지 두려워 주저하게 된다. 복사가 작은 목소리로 "신부님께서 성사주러 오셨으니 주저하지 말고 빨리 나오시오." 하는 말에 깜짝 놀라 일어난 증조부 바오로께서는 이웃이 알까 쉬쉬하며 반가이 신부님을 방으로 모시고 곧 성사 받을 준비를 하는데 그 준비는 간단하였다. 벽에 깨끗한 종이를 한 장 붙이고 그 위에 십자고상을 정성되이 모셔 건다. 김 신부님께서 10여명의 고해자 들에게 성사를 주시고 다시 골배마실로 가시어 거기서 성사를 주시고 은이로 가시면 날이 샌다고 한다. 일가 친척과 동네 사람들의 비난과 박해에 못 견디도록 허탈에 빠져 있는 교우들이 신부님의 권면과 축복 그리고 위로의 말씀과 복사의 권고의 말씀에 마음이 감동되어 다시 열심을 회복하게된다. 떠나시는 신부님을 전송하기 위해 밖으로 나오면 신부님께서는 진심으로 만류하신다.
"내가 이렇게 밤중에 다니는 것은 나 자신보다도 교우들에 대한 외인의 이목 때문이니 부디 나오지 말고 집안에 있으라."하시고 신부님께서 복사를 앞세우고 떠나신 후면 그래도 얼마쯤 나가 보겠다는 생각에 오뱅이산 모퉁이까지 가보지만 벌써 신부님과 복사는 얼마쯤이나 가셨는지 찾을 수 없고 섭섭한 마음을 안고 돌아오실 뿐이었다고 한다.
(정레오 신부 수기 중에서)
이 수기에서 봄과 같이 김 신부님은 험한 산길을 밤으로만 다니면서 전교를 하셨다.
얼마 동안 은이에서 전교 하시던 김안드레아 신부님은 페레올(Jean Jaseph Feireol) 고주교님의 명령을 받고 만주에 머무르고 있으면서 조선 입국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매스뜨르(Maistre)가 신부와 최 도마 부제들의 입국을 돕기 위하여 동생과 어머니와 정들었던 은이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5.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
서울에 도착한 김신부는 중국 교회로 보내는 페레올 고주교님의 편지와 만주에 계신 베르뇌(Berneus)(후에 조선 5대 교구장인 장주교)신부 그리고 매스뜨르(Maistre)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자신이 직접 작성한 지도를 휴대하고 5월14일(음 4월18일) 임성룡의 배를 타고 마포 나루를 떠나 황해로 향하였다.
다행이 순풍을 만나 뱃길은 순조로이 항해를 계속해서연평도 앞바다를 거쳐 순위도 마합도 소청도 대청도를 무사히 지나 백령도에 도착한 것은 5월28일 이었다. 때는 마침 조기잡이 철이라 백령도 부근에서는 청국어선 백여 척이 조기잡이를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김신부님은 어느 청국배에 이르러 청국으로 가는 편지와 지도를 전해줄 것을 부탁하고 다시 순위도로 돌아와 며칠동안 배 떠나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여기서 지체하는 동안 6월5일에는 순위도 관장이 부하를 데리고 김신부님의 배에 와서 중국 배를 쫓을 터인데 배를 잠깐 빌리자 하여 못 빌리느니 빌려야겠느니 하여 옥신각신 사소한 시비가 벌어져 배주인 임성용과 뱃사공 엄수를 잡아다 모진 고문을 가하였다. 사공들은 무서운 매에 못 이겨 김신부의 정체를 말하게되니 그 날밤 순위도 등산첨사 정기호는 30여명의 포졸들을 거느리고 김신부님의 배로 신부님을 결박하여 묶으면서 발길로 차고 주먹질과 몽둥이로 마구 때리는 등 온갖 폭행을 다하였다. 이러한 소란 통에 남은 뱃사람들은 종선을 타고 도망하였다.
때는 헌종 12년 1846년 병오년 6월5일(음 5월12일) 밤이었다. 이같이 하여 체포당한 김신부는 그들이 결박한 대로 하륙시켜 옷을 벗기고 때리며 온갖 능욕을 가하면서 순위도 등산 진영으로 압송하여 등산진 첨사 정기호에게 심문을 받다가 6월9일에는 해주감영으로 이송되었고 이어 해주 감영에서는 김신부를 중대한 사학 죄인으로 단정하여 목에는 큰칼을 씌우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서울 의금부로 압령하였다.
이어 의금부에서는 전후 40차의 심문을 거쳐 1846년 9월16일(병오년 7월26일) 군문효수의 사형을 선고하기에 이르렀다. 그럼 여기서 일성록(정부일기)에 기록된 김신부님의 신문내용 일부를 참고로 삼게하고저 한다
김대건 제6차 공초(병오년 7월19일)
여섯 번째 문초에 말하기를 나는 본이 타국인이 아니오 곧 조선 용인땅에서 태어난 성은 김가요 이름은 재복이며 나의 부친이 서양 교를 대강 아는 고로 서양에서 나온 나신부가 나를 제자로 데려가고자 한다 하더니 15세에 양인(청국사람) 유가와 마부 조신철이가 나와 과천 최영환의 아들 양업과 홍주 최한지의 아들 방지거를 데리고 변문에가서 중국으로 들여보내었는데 방지거는 병에죽고 나는 광동 오문 하가의 집에 있으면서 경교(천주교)를 학습하고 또 불란서사람 이가의 지도를 받아 소서양(마닐라)에 가서 공부하며 방언을 알아 통역관이 되었는데 고국을 사모하는 마음이 날로 심하여 임인년 11월에 의복을 갈아입고 의주에까지 온즉 모든 사람이 다 의심하는 눈치라 다시 들어갔다가 계묘년 11월에 또 몰래 압록강을건너 의주에 이르러서 서울 사는 이가를 숯막에서 만나 작반 하여 서울에 온즉 이가는 본래 집이 없는고로 내가 가졌던 돈으로 "돌우물골"에 집을사고 나도 함께 기거하여 살아온지 4년이 되었다고 하였나이다.
김대건 제40차 공초
경오 윤 5월 26일 좌우포청에서 죄인 김대건 등의 공초를 아룀, 그 포청에서 의뢰된 죄인 김대건등을 다시 추궁하온 즉 대건이 문초에 말하기를 "저의 집에 항상 거한 사람은 이가 세 사람뿐이었는데 하나는 이재영이라하는 현석문이었고 하나는 이재용이었고 하나는 이의창 이었는데 의창은 빈궁하여 의지할 데가 없는 고로 의복도주고 그 문필을 사랑하여 황해도 갈 때도 함께 배를 탔다."고 하였나이다.
위의 심문에서 봄과 같이 김신부님은 자신은 용인 태생이라고 답변하심으로서 용인이 고향임을 천명하시었다.
한편 그 당시 조정에서 심문을 맡았던 포도대장도 김신부의 영웅적 기백과 모험적 용기에 크게 감동하여 마지않았으며 조정의 재상들도 유사이래 조선 사람으로서 외국에 유학하여 서양 문화를 익히고 그들과 교제하여 이름을 떨치기는 처음 있는 일이요, 또한 그의 총명함과 비상하고 명석한 두뇌에 감탄한바 있어 장래가 유망하고 큰 인물이 될 사람을 처단하는 것은 국가 장래를 위하여 애석한 일이니 이를 잘 회유해서 국가의 동량으로 쓰기 위해 아끼자는 여론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일부 폐쇄적이고 고집 센 원로 대신들 중에는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비약시켜 고질적인 당쟁에 결부하여 국가의 죄인이니 지체없이 군문효수를 해야 한다고 맞서 심문이 끝난 후에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두 달 동안을 끌어오다가 결국 어전회의를 열어 임금의 의향을 듣기로 하였다.
이때 헌종 왕도 김신부의 특출한 재주에 감탄하여 그를 아끼어 될 수 있는 대로 살리려는 마음이 있었음을 여러 문헌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조선 교회의 총책임자였던 페레올 고주교님의 편지에서도 다음과 같은 대목을 찾아 볼 수 있다.
"왕이 매우 만족하시어 김신부를 살리자는 대신들의 소청을 흔연히 들어주시려던 찰나에..."
또한 헌종 왕이 어전 회의에서 질문한 말 가운데서도 이를 짐작 할 수 있으니 "김대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 고?" 혹은 "어떻게 처리하면 좋단 말이오" 등으로 자신의 속셈을 시사하시는 말로 대신들의 심중을 타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의 입에서 자기가 원하는 속시원한 답을 듣지 못하게 되자 왕 자신도 이를 결정치 못하고 우유부단하여 10여 일을 지냈다. 이러던 중 조선 정부에는 실로 뜻하지 않은 한 통의 편지를 받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불란서 군함 사령관 세실 제독의 다음과 같은 위협과 협박의 편지인 까닭이다.
이제 그 편지의 뜻을 번역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불란서 나라의 인도와 동지나 해의 불란서 함대 수사 제독 세실(Cecile)은 조선 재상에게 드립니다. 본인은 세계 어느 방면에서든지 우리 국민의 보호를 담당하고 있어 온 바 [엥베르] [샤스땅] [모방] 세 불란서 사람들은 덕망이 높은 분들로서 우리들 사이에 그 명망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1839년 2월1일에 귀국에서 살해되었다는 말을 듣고 저들이 어떠한 중죄를 범하였기에 그와 같은 잔악한 처벌을 받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자 하는 바입니다. 귀국 법령에 의하면 외국인의 입국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경을 넘어 들어왔기 때문에 그들을 살해한 것이라고 변명을 할지 몰라도 어째서 중국인이나 만주인 또는 일본인이 국경을 넘어왔을 때와 같이 저들을 잡아 국외로 내보내는 방도를 취하지 않았습니까? 생각건대 귀하께서는 우리 불란서 황제의 어지신 덕망을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백성이 고국을 떠나 몇 천만리 먼데 가 있어도 우리 황제께서는 결코 그들을 아니 돌보시는 바 아니오. 천하 어디를 막론하고 두터운 보호를 해주시며 그 국민이 살인이나 방화 같은 중죄를 범 하였을 경우에 그 사실을 조사하여 그의 적절한 죄를 다스립니다.
그러나 만일 허물도 없이 위해를 입었다 하오면 그것은 불란서 황제를 크게 모욕하는 일이며 그 분노를 초래하는 것에 틀림없는 일인가 합니다. 우리나라 세 선비를(註, 범주교, 나신부, 정신부) 살해 한데 대하여 귀국재상이 곧 답하기 난처하다면 명년에 군함을 보내어 그 답장을 받고자 하는 바입니다. 또 한가지 더 말해 둘 것은 불란서 황제는 그 국민을 자부같이 사랑하시는 고로 이후에 우리나라 백성을 살해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귀 조선이 큰 재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때에 이르러서 귀국의 임금이나 신하 백관에 이르기까지 그 원망을 다른 사람에게 돌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저지른 불인, 불의, 무례를 스스로 원망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가 조정에 오기는 8월 24일 이었다. 사실 조선 정부에서는 1839년 기해년에 불란서인 주교 신부 세명을 죽이고 난 뒤 항상 마음을 놓지 못하던 차에 이 같은 협박 편지를 받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1842년 임이년에 중국이 아편전쟁으로 영국에 패전하고 많은 배상금을 물고 여러 항구를 영국의 명령대로 조차하게 된 것을 보고는 더욱 겁을 먹었었다.
지금까지는 오직 중국만이 제일 강대하고 문명한 줄로 알아 상전으로 섬기고 대국이라고 일컬어 중국의 글, 중국의 종교, 중국의 사상이라면 덮어놓고 맹신 맹종하던 사대주의 조선 위정자들에게 아편전쟁으로 청국이 패했다는 사실은 청천의 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하늘같이 믿고 상전으로 받들던 대국이 무너졌으니 누구의 그늘을 믿고 이 불란서와 대항하랴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재상들까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였다.
(註,1846년 8월 9일에 이 질문서를 보내고 10일에 그 배는 떠나갔다.)
불란서 때문에 내외가 점점 소란 하여가는 9월 15일 왕은 김대건 사건을 좌우간 처리하겠다는 생각으로 회정전에 납시어 중신들을 모아 어전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신하들은 한결같이 불란서 수사 제독 세실의 협박 편지는 양이들과 은밀히 내통하는 사학(천주학)하는 무리들의 상통한 소행으로 인함이오니 사학 무리의 고수 김대건을 속히 처단하여야 한다고 한결같이 말했으며 특히 형조판서 조병현은 다음과 같이 왕의 재가를 촉구하였다.
"김대건을 죽일 가부는 이미 대신들의 아뢰온바 있사와 다른 의논을 용납하지 아니 하오니 급히 처분을 내리 시옵소서" 하고 강경하게 재촉하였다.
저들이 세실 제독의 편지에 전전긍긍하면서도 김대건 신부의 처형을 서두른 데는 두 가지 이유를 들 수가 있다. 그 첫째는 나이 아직 어린 왕이 성질도 온후하고 판단성도 적은 터에 김대건의 재주와 그 인격과 학식에 감탄하여 우물쭈물 하면서 용서해 주려는 저의가 있음을 안 까닭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선왕들이 구적 같이 여기고 대역 부도의 무리로 인정하여 용서 없이 처단한 선왕의 유지를 거역하는 불효 불충의 죄를 면치 못할 것이오 나아가서는 수백년 동안 유교 사상으로 닫혀진 국시를 문란케 한다는 점이었고, 둘째로는 불란서라는 서양 오랑캐들은 영국과는 달리 그리 두려워 할 나라가 못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저의나라 백성을 세명이나 죽였는데도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런 말이 없다가 이제 와서 이러구 저러구하며 명년에 다시 오느니 그때 회답을 해 달라느니 하는 것은 그렇게 두렵게 생각할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대세가 이쯤 되니 왕 자신도 이미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달으시고 "그럼 어떻게 처벌하면 마땅하겠느냐?" 고 물으셨다. 이때 영의정 권돈인이 아뢰기를 "그 죄인은 대역부도하여 처치함에 좋을까 합니다." 하였고 이어 배석했던 모든 대신들도 이구동성으로 "사학 죄인 김대건을 목베어 모든 이들을 경계함이 옳은 줄 아뢰오" 하였다. 이에 헌종 왕도 "그대로 하라" 힘없이 한마디하시고는 자리를 떴다.
심약한 왕은 자기의 의지를 그대로 밀고 나가지를 못하고 중신들의 의견에 눌려 아끼시고 살리려 하던 김대건 신부의 사형을 허락하고 말았다.
이 같이하여 김대건 신부는 군법 시행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고 군문 효수로 1846년 9월 16일 서울 새남터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치명의 화관을 받으셨다.
6.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시신 미리내에 안장하다.
새남터에서 장열히 순교하신 김안드레아 대건신부님의 시체는 백사장에 가매장되어 군졸에 의해 엄중한 감시 하에 있었으나 40일이 지나서야 감시가 풀렸다.
"국법에 의하면 죄인들의 시체는 3일동안 형장에 남아 있어야한다. 이 기한이 지나면 친지들이 마음대로 시체를 묻을 수가 있다. 그러나 (김대건) 안드레아의 시체는 의금부의 명령으로 그가 사형을 당한 바로 그곳에 묻히었다. 그의 옷을 그대로 입혀두고 머리를 다시 목에 가져다 붙이고 시체는 깨끗한 거적으로 쌌다. 관장은 무덤 둘레에 군인들을 보초로 세워 신자들이 시체를 훔쳐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40일이 지난 뒤에야 신자들이 이 귀중한 유해를 거두어 미리내 산에 좀더 예의를 갖춘 장례를 지낼 수 있었다".
한편 김신부의 시체를 미리내로 이장하는 과정에 대해서 한국 교회사 연구소 최석우 신부에 의해서 1983년 교황청 조사에 따르면 박순집의 아버지 박바오로를 비롯하여 한경선 나창문 등 여러 교우들이었다고 교회 공식 문헌이 새로 밝혀졌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1921년에 오마지아 신부와 오기선 신부께 직접 증언한 이민식 원선시오(당시92세)의 단독 김신부의 시신 안장 설은 깊은 의문이 재기된다. 그러나 김신부의 시신을 안장한 미리내 산을 이민식 원선시오의 선산(先山)을 후에 교회에 헌납했다는 것을 보아서 그가 직접으로 혹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관여한 것은 틀림이 없지않나 생각한다.
7.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순교에 대한 페레올 주교의 애석한 표현
한편 김대건 신부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한 후 박해 중에 지방에 흩어져있는 신자 6000명 이상에게 성사를 준 페레올(Ferreol) 주교는 애석해하는 마음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장인 바랑(Barran)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에 관한 것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나서 덧붙여서 김대건 신부의 인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젊은 본방인(本邦人) 신부를 잃은 것이 내게 얼마나 가혹한 것이었는지를 신부님은 쉽사리 생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를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듯 사랑하였으므로 그의 행복만이 그를 잃은 데 대한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는 그의 나라에서 사제품에 오른 사람으로는 처음이고 또 지금까지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직자로서의 교육에서 그의 동포보다 훨씬 뛰어난 사상을 얻었습니다.
그의 열렬한 신앙심, 솔직하고 진실한 신심, 놀랄 만치 유창한 말씨는 대번에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그에게 얻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성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그는 우리가 바라던 것보다 더 나았었고, 몇 해 동안만 실천을 하였더라면 지극히 유능한 신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조선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어떤 일이라도 맡길 수가 있었으니 그의 성격과 태도와 지식은 그의 성공을 확실히 하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조선 포교지가 지금 처하여 있는 처지로 보아서 그를 잃는 것을 엄청나고 거의 회복할 수 없는 불행이 되는 것입니다". 라고 썼다.
8. 헌시
-배달순-
먼 곳에서 닭이 운다.
새벽닭이 울고 있다.
꼭꼬댁 꼭끼오우.....
먼 곳에서 홰를 치면서
어둠을 쫓는 새벽닭의 울음소리,
김대건 신부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어디선가 꿈결인 듯 들려오는 노랫소리,
신비한 가락의 노래, 노랫소리를,
먼동 틉니다, 잠을 깨세요.
동녘 하늘에 주님의 은총이 가득찬 이 새벽
어둠의 옷 벗고, 광명의 갑옷을
어서 입으세요.
성인 되라고 새벽인사를,
저 하늘에서 별 둘 따다가
드리고 싶어요, 하나는 기쁨의
하나는 사랑의 선물이 되게 선물이 되게
감방의 잠 속에서 일어나는 김대건 신부
문득 새벽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오 하느님, 내 주 예수여
크신 은혜로 이 땅에 태어난
이 불초한 종 안드레아는,
이제 아버지의 나라
그 영원한 품속으로 떠나갑니다.
아버지여, 저의 영혼을 받아 주소서."
거듭 뜨겁게 기도하는 김대건 신부
"마지막 바라고 비옵건데, 아버지여
아버지께 바치는 저의
작은 충성과 죽음을 어여삐 보시고
이 가련한 조선 백성들에게 믿음의 큰 빛을 열어 주소서.
부디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 되게
허락하여 주소서,"
이 때 열린 하늘 사이로
나팔소리와 같은 맑은 음성이 들려 왔다.
"이리로 올라오너라!
내 아들아, 어서 올라오너라!"
김대건 신부는 어둠을 털고
새벽을 향해 걸어간다.
빛이 기다리는 형장,
금모래 엉켜 붙은 한강 새남터의 나팔소리, 나팔소리
휘광이들이 돌며 춤추는,
북소리를 향하여
김대건 신부는 늠름하게 걸어간다.
핏물 튀며 번지는 하늘
딸기빛 조선의 하늘 밑을.

9.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시복과 유해 축성
김신부님의 유해는 55년 동안 이곳 미리내에 고이 모셔 있다가 시복 준비를 위해 1901년 5월 21일 순교자 조사 위원장 위돌 박신부에 의해 발굴되어 용산 신학교 성당으로 모셔왔고 1925년 7월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시복식이 거행되어 복자위에 올리셨다.
지금은 혜화동 대신 학교 성당 제대 아래에 1960년 7월5일에 모시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이 위대한 수선탁덕의 본 모습을 알아내기 위해 오랫동안 고심하고 연구하던 중 1971년 3월 16일에 해부학의 권위자 권흥교 교수에 의해 과학적인 조사와 의술로 유해를 세밀히 측정한 결과 상하악골을 본 모상대로 재현하여 얼굴 모습과 신장을 알아내는데 성공하여 신장은 167cm임을 알아내었다.
드디어 1984년 5월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한국 천주교 200주년 행사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서 103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